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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의 무한[無限], 그 섬광의 세계
김남수(안무비평)

감싸는 공간
박세연 작가의 사진 작업, 사진과 일상 사물을 활용한 아카이브 작업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감싸는 공간’의 감각이다. ‘감싸는 공간’이란 이중적인 느낌인 것이 우선 작가 스스로 자신이 처해 있는 실존적 장소를 공간화하는 방법이 자신의 사진과 아카이브로 “공간을 감싼다”라는 것이 있다. 미디어 이론가 백남준의 표현을 빌리면, “‘빈 공간의 공포’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화한다”와 비슷한 면이 있다. 베를린 지하철 역에 덩그러니 혼자 있을 때의 공포, 낯선 장소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신표현주의 ‘매드니스의 아가리’ 속에 처한 기시감이 작가로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단독자로서 마주하는 것은 신[神]이어야 하는 것이나 이미 “신없음”의 상태에서 단독자인 것은 늘 마주하는 것이 일상과 그 일상을 알려주는 시계 알람 같은 ‘빈 기호’들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가는 그 ‘빈 기호’들 뭉치들을 재배열하고 재배치할 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의 기호로 번역하여 그 비어있음의 상태, ‘신없음’의 상태가 주는 고독 너머에서 어떤 신성성의 지표를 찾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실존적으로는 장소적 이정표를 드러내지만 그 자체로는 기능적인 의미 이외에는 비어있는 기호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는 “살아야겠다”는 부림의 퍼포먼스로서 찍은 작업들이 있다. 사진 아카이브 작업 <어디에 있습니까. Wo sind wir?>라든가 자신의 가장 익숙한 공간인 ‘작가의 방’에서 일어나는 현상학을 다룬 사진 아카이브 작업 <어두운 방의 별: 여름(Ver. 01)>은 그 작업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대부분 ‘빈 기호’로서의 사진들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하나 하나의 공[空]함을 작가 스스로 어루만지듯 “공간화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을 소위 “공간을 감싼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 나타나는 그 외면적 의미망, 구체적인 맥락에서 뜯겨져 나온 비의미의 세계가 작가는 수집과 우발적인 분류 그리고 재배치를 통해 음악적인 것이 되면서 어느 장소를 ‘감싸는 공간’의 감각으로 전환시켜 버린다. 분명히 사진 아카이브 작업이나 그 안에는 잔잔하게 별들의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고 할까. 마치 고대 그리스 피타고라스 학파들이 만유[萬有]의 모든 것에서 정수배[定數倍]의 음악적인 것을 향유했듯이.
우리가 눈 앞에서 마주하거나 듣게 되는 것은 박세연 작가가 연출해낸, 그러나 우주의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 초차원 정보집합체]에 아주 가볍게 접속한 듯한 매트릭스 세계 혹은 소리우주 같은 것이다. 20세기 모더니즘의 다종다기한 수법 속에서 기존의 헌 부대에 이 시각과 공감각을 집어넣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이 젊은 작가에게 온당한 것은 아니다. 작가는 지금 동굴 벽 가득히 구체적인 맥락보다 높은 차원으로서의 추상적 우발공간을 창출하고 그 공간에서 일렁이는 매트릭스 기호들을 마주하면서 동굴 벽에 닿아서 울리고 되울리는 어떤 사운드스케이프 공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태초의 소리우주 공간을 현재, 결국, 오늘, 지금, 당장에 직접 체험으로 겪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미력[微力] 신세계는 이희미[夷希微]의 구간을 통과해 가야 한다. 즉 보아도 보이지 않고[夷],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希], 있는지 만져보려 해도 만져지지 않는[微] 단계. ‘빈 기호’들의 세계가 딱 그렇지 않은가.

일상 속의 무한
“제가 2010년에서 2013년 사이 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 그냥 한국에서 ‘유형학적 사진’이라는 게 좀 유행을 하던 시기였어요. 카메라라는 기기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특징적인 부분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유행을 따라서 잘 세팅한 후에 잘 찍기는 어렵다고생각해서 별로 시도하지 않았었죠. 그러다가 사진 아카이브 작업을 하면서 착안이 된 것이 이 기기를 이용해서 만약 사람이 손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을 똑같이 형태를 짜주는 그런 느낌으로 하면 어떨까였죠. 아주 몇 개의 디테일만 바뀌는 변화를 주는 작업으로서..” (박세연 작가 인터뷰 중에서. 2022년 11월 10일)

작가가 하나 하나의 ‘빈 기호’처럼 보이는 사진들, 지금은 일반화된 사진이란 기표를 그 개별자적 위상이 가냘프고 희미하게 보이더라도 그 디테일 변화에 따른 이미지 집합이나 군[群, group]이 될 때 갖는 효과에는 큰 의미를 두는 것 같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무한[無限, infinity]에 가까운 것이지만, 감각적으로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찰나와 현존의 반복 이미지, 하프 소리 사라진 동굴의 기억 공간 같은 잔여 이미지가 있는데, 결국 현대 사회의 덧없는 지각 세계로부터 길어올린 것이 아니라 ‘신없음’ 상태의 “살아감”의 상태가 아니라 어떤 “삶”의 의미를 북돋는 인덱스 기호의 상태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상태란 무엇인가. ‘감싸는 공간’ 특유의 반향을 이미 가늠하고 있다. 즉 유형학적 사진으로 시작된 사진 아카이브 작업이 수[數]의 신비로운 나열, 즉 수열적인 무한에서 나오는 효과도 있겠지만, 그렇게 공간화되는 가운데 이번에는 그런 공간 자체가 작가 자신을 감싼다고 할까. ‘감싸는 공간’은 반향하여 다시 사람을 감싸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을 감싼다 라는 것은 공간이라는 선험적인 영역을 인식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감쌈과 동시에 그 공간 역시 작가의 실존을 감싼다는 것이 된다. 숫자로 되어 있는 매트릭스라고 해도 그 매트릭스는 공간적 은유가 아니라 이 감싼다는 감각의 안팎을 드러내는 작가의 기호이다. 작가는 따뜻한 느낌도 보호받는 느낌도 원치 않지만,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선상에서 보이는 것과 함께 전체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만들고 싶은 욕망을 그러한 기호 속에 담아내고 있다. 감정과 정동의 기호는 아니지만, 공간을 감싸는데 공간이 되레 감싸는 자를 감싸는 이 이중효과는 박세연 작가의 작업 토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분절, 마디, 솔기, 단층선, 어떤 집합, 어떤 파노라마, 리듬(들), 말할 수 없는 이미지 연쇄, 말의 감쇠 효과, 리듬선들의 집합으로서 포락선[包絡線, envelope], 그 선을 타고 떨어지는 첨탑의 새 같은 ‘빈 기호’들.. 이라는 말놀이 속에서 박세연 작가의 사진 아카이브가 어떻게 일상 속의 무한을 연출하고 있는가를 살짝 엿볼 수 있다. 이렇게 방 안으로 빛이 비스듬히 스며들어와 뜻하지 않게 만들어지는 빛의 삼각형 무리들 그리고 시계열적 이미지들, 지하철 역에서 아무런 대꾸가 있을 수 없는 역 이름들의 나열 같은 것이 반복되면서 마디 — 프리스타일 랩의 ‘라임’이라고 해도 좋다! --를 통해 어떤 리듬감을 자체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한다. 박자를 구하면서 동시에 박자 쪼개기를 하면서. 우리 일상은 그처럼 음악적인 것이 잠재해 있는 신비로움이 여전히 안쪽에 도사려 있다. 박세연 작가는 이러한 일상 속의 신비를 도출해내는 방식을 알고 있으며, 이를 자신의 작업 속에서 충분히 이끌어낸다고 할까.

트랜스토폴로지의 영역
지금은 모더니즘의 시대가 아니다. 결국, 오늘, 지금 우리가 마주한 것은 ‘모던’이라는 어떤 역사주의적 도식에 의한 단계, 서구의 사적 유물론이 표방해온 역사의 단계가 소멸해버린 어떤 모퉁이이다. 포스트모던은 그러한 소멸을 영문 모르면서 자축해온 풍자극이자 자해공갈극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시간대로부터, 심지어 태초로부터 호출하고 소환해온 모든 이미지들이 시간교환수적인 타블로 위에 진열되고 본래적인 신성성을 탐했으나, 결국 전시 기간이 끝난 후에는 쓰레기통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서 살짝 ‘신의 비밀’을 엿보게 한 마니에리슴, 즉 ‘인간의 손’으로 ‘신의 얼굴’ 혹은 ‘신의 목소리’를 감각하게 했던 장인의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은 꿈꿨으나, 결국 묵시록적 결말로 허무하게 끝났다. 왜냐하면 역사를 구동해온 차축[axis]과 그 차축의 회전을 따라 진행되어온 지난 역사의 ‘축의 세계’[Axis Mundi]가 드디어 폐막했다.
지금 박세연 작가의 작업을 보는 것은 역사 시대의 종료 이후의 새로운 축, 작가의 개인적인 축[各軸, individual axis]을 가늠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얼핏 말라르메의 여백이나 공[空], 사무엘 베케트적인 기다림의 게스투스처럼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스스로의 축을 세우는 과정의 일부이거나 이미 축 자체의 일부일 수도 있다. 사진 작업을 하는 마니에리스트로서 작가는 이 “살아감”의 현행하는 단계의 허무주의를 “삶”이라는 충만한 의미의 영역으로 안내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반복되는 패턴처럼 보이고, 패턴 속의 내재적인 리듬과 우주의 화엄적인 연결로 설령 보일지라도 그것은 기존의 ‘축의 시대’라는 깔대기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다가오는 미래’를 위한 아카이브인 것이다. 즉 과거를 조망하기 위한 아카이브가 아니라 데리다가 말하듯 미래를 전미래 시제 -- “그가 도착할 때쯤이면 나의 편물 작업은 이미 다 마친 상태일 것이다” 와 같은 어법 — 의 삶을 위한 아카이브인 것.
이와 같은 아카이브를 우리는 ‘아카이브 피버’(데리다)라고 부르고 있으며, 박세연 작가는 자신의 작업 속에서 이러한 전환을 행하고 있다고 할까. 곧 트랜스토폴로지[trans-topology], 즉 위상학적 전환이 일어난 세계이다. 똑같아 보이는 가시성 너머에서 음악적인 것이 바흐의 푸가나 오라토리오처럼 은근히 배어나오는 것.

“어두운 공간 속에서 들리는 시계 소리는 느끼게 하는 동시에 작은 변화에도 귀 기울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시각에 울리는 종소리를 통해 습관을 정정합니다. 원래는 정각을 치는 것인데요, 제 작품 속에서는 ‘지금 여기에 있는 시간들’에 치게 만들었어요. 1시 11분에 치거나 2시 22분에 치도록. 기존에 약간 습관적으로 했던 거를 바꿔보는 느낌이랄까요.”

우리의 관성은 ‘뉴턴적 눈병’(박동환)이나 ‘클래식에의 안주’(아도르노)를 익숙한 유행가 가사처럼 즐기려고 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병의 즐김과 관성에의 편승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공략할지를 모색한다. 물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의 소리랄까, 허공꽃처럼 눈병 걸린 자의 느낌의 사진이랄까. 에서 그랬듯이. 브레히트적인 소격 효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차르트처럼 완전히 녹아버린 것은 아닌. ‘감은 눈’으로 듣되, 이미 ‘듣는 눈’이 되어버린 것처럼. 사진을 보는데, 음악소리가 들리는 공감각은 ‘감은 눈’ 안에서 ‘뜬 눈’이 반짝 한다는 뜻이다. ‘듣는 눈’은 그렇게 ‘뜬 눈’으로서의 또다른 신체이다. 박세연 작가는 트랜스토폴로지의 기획 속에 이러한 신체성의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할까. 사진이라는 시각적인 작업이 되레 음악적인 것, 청각적인 촉각을 시도하고 있기에 본래 소리우주가 가진 입체적인 타입, 수직으로 높이 오르는 화성악적인 부분을 지양하고 마치 쇼팽의 피아노곡처럼 낮은 동유럽의 구릉지대를 포복하듯이 그러나 끈질기게 기어가는 포월[包越, 기어서 넘어감]이라고 할까. 일련의 사진 아카이브 작업은 확실히 수평적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의 지혜이자 실행으로서 뒤로 끈끈한 액의 흔적을 남기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돌연한 굉음! 예고없는 시각, 지금, 오늘, 지금, 여기, 당장에 울리는 종소리처럼!
‘감싸는 공간’에서 공간이 되레 사람을 감싼다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감각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비어있는 선험성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세연 작가는 사진 아카이브 작업으로 안무[按舞]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포월하는 세계, 감싸는 공간 속에 다시 감싸이는 세계를 안무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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